“이제는 라면 가격도 체크하게 되네요.” 서울 상암동의 대형마트에서 만난 직장인 이모(35)씨는 진열대 앞에서 평상시 보다 조금 더 오래 서성였다. 숫자가 바뀐듯 한 진라면.
그는 구매를 망설이지는 않았지만, 평소보다 가격표를 더 들여다봤다. “자잘하게 오르니 한 달 지출이 쌓여요.”
2025년 4월, 오뚜기를 시작으로 라면·유제품·아이스크림·맥주까지 생활 식품 전반이 일제히 가격을 인상한다.
금액은 많지 않지만, 타이밍이 의미심장하다. 정국 혼란, 정부 개입 공백, 소비자 체감 역치가 무너진 지금. 기업들은 그 틈을 정확히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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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공백기에 가격을 인상하는 라면 및 식품 업체들, 사진=조선일보 |
실제로 오뚜기와 남양유업은 4월 1일, 농심은 3월 17일을 기점으로 가격 인상을 단행했다.
발표 시점은 모두 3월 셋째~넷째 주였으며, 이는 대통령 구속영장 발부와 비상계엄 선포로 정부 기능이 멈췄던 시기와 맞물린다.
◆ 60원일 뿐? 시장은 ‘체감 둔화’를 노렸다
오뚜기는 진라면과 오동통면 등 주요 제품의 출고가를 평균 7.5% 인상한다. 컵라면은 최대 150원, 남양유업의 초코에몽은 200원 올랐다.
하겐다즈 파인트는 평균 12.6% 인상됐다. 모두 ‘한 입’ 크기 가격이다. 그래서 더 조용하고, 그래서 더 치명적이다.
💡 가치있는 정보 | 주요 인상 품목 리스트
- 진라면·오동통면·열라면: 평균 60~100원 인상
- 초코에몽·아몬드데이: 200원 인상
- 하겐다즈 아이스크림: 평균 12.6% 인상
- 맥주: 카스·기네스 등 병·캔류 100~250원 인상
기업들은 “환율과 원재료 인상, 유가 불안정”을 이유로 들지만, 주된 원재료인 밀가루·설탕·팜유는 작년보다 오히려 가격이 하락했다.
소비자단체는 이를 두고 “시장심리와 체감마비를 겨냥한 ‘전략적 인상’”이라고 본다.
특히 이 흐름은 다수 기업이 동일한 시기에, 유사한 폭으로 움직였다는 점에서 ‘묵시적 담합’과 닮아 있다.
가격표는 혼자 오르지 않는다. 누군가는 시기를 정하고, 누군가는 눈치채지 않을 만큼 올린다. 그래서 이번 인상에는 ‘설계자’가 존재한다는 시선이 지워지지 않는다.
실제로 식품·유제품·주류·아이스크림 업계에서 최소 10여 개 이상 업체가 2주 안에 가격 인상을 공지했고, 대부분 4월 1일 전후로 실제 적용됐다. 시기도 같고, 설명도 비슷했다.
◆ 정부는 어디에 있었나, 기업은 왜 지금을 택했나
정국이 혼란스럽다. 비상계엄 선포 이후 민생경제 컨트롤타워의 기능은 눈에 띄게 약화됐다.
물가대책협의회는 2개월째 멈췄고, 공정위는 담합 조사의 손을 놓았다. 기업들이 인상 발표를 앞다투며 내놓은 배경엔 이 같은 권력과 정책의 공백상태가 명확히 작용했다.
한편으로 소비자 심리도 변했다. 너무 많은 가격 인상을 겪은 탓에, 100원·200원 오름세에는 더는 분노하지 않는다.
경제학자들은 이를 '인지 마비 현상'이라 부른다. 작은 변화는 무시되고, 습관은 그대로 유지된다. 기업 입장에선 최적의 인상 타이밍이다.
💡 가치있는 정보 | 구조적 분석 요약
- 정부 통제 시스템 부재: 물가 간담회 실질효과 미비, 조사 기능 약화
- 기업 수익성은 상승세: 다수 업체 이익 증가 중 인상
- 소비자 인지 지연: 가격 인식의 둔화, 체감 역치 무너짐
◆ 이익은 기업이, 선택은 소비자가… 책임은 누구에게?
남양유업의 영업이익은 86.3% 급등했다. 대상은 43%, 오리온은 10%, CJ제일제당은 20% 증가했다. 실적이 나쁘지 않은 기업들조차 가격 인상을 단행했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지금 올려도 된다”는 확신 때문이다.
오뚜기는 지난해 해외 매출이 15% 증가하며 K-푸드 수출 확대의 수혜를 입었고, CJ는 가정간편식 수출 증가로 글로벌 시장을 키웠다. 수출로 실적은 개선됐지만, 인상은 국내 소비자에게 먼저 적용됐다.
그렇다면 소비자에게 책임이 있는가? 아니다. 문제는 정보 부족과 구조적 방치다. 정부는 가격 인상 방어에 사실상 실패했고, 기업은 이를 기회로 삼았다.
소비자는 ‘선택’ 외엔 도구가 없다. 이 구조에서 책임은 우선 제도를 설계하는 쪽과, 그것을 활용한 쪽에 먼저 있다.
💡 가치있는 정보 | 해외 식품 가격 통제 정책
- 러시아: 사회필수품 24개 품목에 대해 60일 내 10% 이상 가격 상승 시, 최장 90일간 가격 상한제 도입.
- 영국: 50년 만에 식료품 가격 통제 논의 재개. 슈퍼마켓 대상 자율적 가격 인하 압박.
- 미국: 연방 차원에서 식품 기업의 가격 인상 감시 강화. FTC 통해 이윤 과다 추구 억제 조치 검토.
◆ 이젠 묻는다, 감정 없는 가격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마트 계산대 앞에서 ‘몇백원’을 고민하는 건 당장 이것을 못 살만큼 가난해서가 아니다. ‘내가 당하는 변화가 어떤 구조 속에서 발생한 것인지’를 알아야겠다는 본능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작은 가격에 큰 구조가 숨어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라면 하나에 분노를 터뜨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순간, 변화는 더 교묘해진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건 거창한 저항이 아니라, 조용한 계산이다.
첫째, 가격이 오른 품목은 ‘왜’ 올랐는지를 아는 습관부터 갖자.
둘째, 실적이 좋은 기업이 동시에 가격을 올렸다면, 그 제품은 한 번쯤 다른 대안과 비교해보자.
셋째, 황당한 인상 사례는 SNS나 커뮤니티에서 공유하자. 정보는 말보다 오래 남고, 시장은 그 흔적을 본다.
불매는 강요일 수 있지만, 소비 조정은 질문이다. 그리고 질문은 변화를 이끄는 단초이다.
우리는 모두 구조 속에 있지만, 동시에 그 구조를 인지하고 움직이는 주체이다. 가격표는 숫자이지만, 그 숫자가 설계된 이유를 질문하는 순간부터 사회는 달라질 수 있다.
밸류타임즈 이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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